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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돌 9단에게 파죽의 2연승을 올리고 있는 알파고는 놀라움을 넘어 바둑의 혁명을 가져왔다는 평가가 쏟아지고 있다. 


바둑의 기원은 여러가지 주장이 있다. 그 중 몇 가지만 살펴보면, 천체관측설과 요순 창시설이다. 천체관측설은 별자리 관측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 별자리 관측을 통해 제례의식과 길흉화복을 점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견해다. 그리고 요순창시설은 중국 요황제의 아들 단주와 순황제의 아들 상균의 어리석음을 일깨워주기 위해 개발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그렇다면 현대 바둑의 기초가 확립된 것은 우칭위엔(吳淸源)에 의해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인 듯 하다. 우칭위엔은 20세기 최고의 기사로 손꼽히는데, 본래 1914년 중국 푸젠성에서 태어난 중국인이다. 그는 14세때 일본으로 건너가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 문하에서 입문하여 1929년 3난에 올랐고, 1984년 9단으로 은퇴하였다. 그가 현대 바둑의 기초를 닦은 인물로 평가 받는 이유는 1934년 '기타니 미노루'와 함께 '신포석법'을 창안하여 지금의 바둑에서 큰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기타니 미노루, 사카다 에이오, 다카가와 가쿠 등을 연파하여 1인자에 올라섰다. 따서 혼인보 도사쿠, 슈사쿠와 함께 3대 기서응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기타니 미노루(木谷實)'를 짚고 넘어가자. 기타니 미노루는 1909년 효고현에서 태어나 1921년 '스즈키(鈴木爲次郞)' 문하에 입문하였다. 1924년 초단을 시작으로 앞서 언급한 우칭위엔과 함께 신포석을 제창하였고, 이후 극단적인 실리 기풍으로 전향하였다. 또한 '기타니 도장'을 세워 오타케 히데오, 가토 마사오, 조치훈, 다케미야 마사키, 고바야시 고이치 등을 배출시켰다.


한국에 바둑이 전래된 것은 고조선 말기 전후로 보고 있다. 특히 기자 전래설과 한사군 전래설 이 2가지 주장이 가장 유력하다. 기자 전래설은 중국 은나라 말 기자가 약 5천여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는데, 이들 무리 중 바둑에 뛰어난 자에 의해 한국에 전해졌을 것이라는 견해다. 한사군 전래설은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중국의 문물이 함께 들어왔는데, 이 과정에서 바둑도 함께 전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주장이다. 특히 기자의 존재에 대해 회의적인 학자들은 한사군 전래설이 더 유력하다고 피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사를 통한 한국의 바둑 기원을 찾을수는 없는 걸까?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장수왕시절 당시 바둑의 고수로 알려진 승려 도림이 장수왕의 명을 받아 백제 개로왕에게 바둑을 통해 접근했다는 기록이 있어 최소한 고구려 장수왕 이전에 바둑이 전래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는 효성왕(제34대 왕, 재위 737∼742)과 신충이 바둑을 두며 우정을 맹세한 일화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8세기 이전 신라에 보급되었고, 그 이전에 고구려와 백제에 성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많은 왕들이 바둑을 즐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왕들이 바둑을 두었던 기록은 실록에 약 380여건, 승정원 일기에도 280여건에 이른다. 특히 세조는 숙위장군을 수시로 불러 활을 걸고 바둑을 자주 두었다고 알려져 있다.


Posted by Road Id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