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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크고 작은 외침 모두를 합쳐 약 1,000번이 넘는다. 그 과정을 통해 국가의 흥망성쇠가 있어왔고, 다시 재건하고자 부흥운동이 있어왔다.


그런데 경술국치 이후 중국 및 미국의 항일운동에 대해서는 독립운동이라고 하고 그 외 국가 재건은 부흥운동이라고 한다. 왜 일까? 심지어 경술국치 이후 근왕파 중심으로 조선왕조의 복원하려는 시도는 독립운동이라 하지 않고 복벽주의 운동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나라 역사상 부흥운동은 무엇이 있었을까?


1. 고조선 부흥운동

고조선(위만조선)이 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고조선 유민은 큰 저항을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중심에 해모수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BC108년 고조선이 한나라와 약 1년간 전쟁을 벌이다가 패망하였는데, 내분에 의한 패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나라에 항복하길 원하는 신하들은 우거왕을 죽였지만 '성기'는 끝까지 왕검성에서 투항하였지만 함락당하고 만다.


2. 남부여의 부여 부흥운동

부여(기원전 2세기~494년)에 대한 연구가 고대사이기 때문에 국내 연구가 매우 미흡하다. 부여는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남부여로 구분하여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중 남부여는 백제 성왕이 백제의 국호를 남부여로 바꿔 패망한 부여의 이름을 사용했다. 과거에는 이에 대한 단순 국호 변경으로만 보았으나 이에 지나지 않고, 건국신화, 무덤 양식등을 비교한 연구들이 나오면서 백제가 부여로부터 분파되었고, 이를 오래전부터 계승해온 것이 아니냐는 견해가 생겨났다.


3. 두막루의 부여 계승

두막루가 우리나라의 역사인지 논란이 있지만 부여 유민이 나하를 건너 건국한 국가라는 견해가 지지를 얻어가고 있다. 위치는 중국 헤이룽장 성의 하얼빈시 부근으로 추정되며 AD 410년경 건국되어 726년 약 300년간 존재하다가 발해 무왕에게 멸망했다. 따라서 고구려에 의해 패망한 부여 유민이 만주 북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세운 국가라고 본다면 두막루는 부여를 계승한 국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두막루를 실위 또는 몽골계 국가로 보는 견해도 있기 때문에 부여의 계승국이냐 혹은 말갈족을 우리 민족으로 보느냐에 따라 두막루에 대한 견해가 크게 달라진다.


그런데, 두막루의 구성은 부여에서 넘어간 유민들인데, 이들 대부분은 말갈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말갈족이라 우리 역사에 편입시킬 수 없다면, 고구려, 발해는 우리의 역사가 아닌 셈이 되는 것이다. 교과서대로 말갈족은 지배층이 아닌 피지배층이라는 반론을 편다면, 부여 주민의 대부분은 말갈족이기 때문에 부여는 우리 역사가 아니다. 또한 말갈족이라 하여 단 한명도 관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 이유로 발해 건국당시 두막루와 발해 건국시 거점지역에 양분되어 지방 호족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대조영이 거병할 당시 흑수말갈 출신의 무장들이 있었다. 뿐만아니라 두막루는 726년 발해 무왕에 의해 정복되에 흡수되어 양분되었던 흑수말갈 모두 발해에 동화되었다.


말갈족은 7부족으로 나뉘는데, 숙말말갈(지린 시), 백산말갈(지린성 - 바이산 시, 옌벤 조선족 자치주, 연해주 - 하산/하산스키 군), 우루말갈(연해주 - 우스리스크, 파르티잔스크, 올가), 불열말갈(헤이룽장 성 - 지시 시, 무단장 시), 철리말갈(헤이룽장 성 - 하얼빈), 훨희말갈(연해주 - 달네렌첸스크), 흑수말갈(헤이룽장 성 - 솽야산 시, 자무쓰 시, 허강 시, 이춘 시, 하바롭스크 지방 - 비킨, 뱌젬스키, 라조, 하바롭스크)이다. 말갈(靺鞨) 7부 중에 불열부(불열말갈), 백돌부(백돌말갈), 호실부(호실말갈), 안거골부, 흑수부(흑수말갈)는 퉁구스(숙신계)계 부족이며, 옛 부여와 북옥저 지역에 있는 속말부(속말말갈), 백산부(백산말갈)는 예맥계인 부여와 옥저에 숙신계가 혼합되어 있었으며 점차적으로 점차 고구려와 동화된 부족이다. 이외에 사모말갈(思慕靺鞨), 군리말갈(郡利靺鞨), 굴열말갈(窟說靺鞨), 막예개말갈(莫曳皆靺鞨) 등도 있었다. 


p.s. 그렇다면 여기서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 바로 금과 청에 대한 해석이다. 어쩌면 여기서 중국의 동북공정이 떠오를지 모른다. 


4. 검모장과 안승의 고구려 부흥운동

고구려의 경우,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패망한 후 고안승, 고연무, 검모장 등에 의해 부흥운동이 있었다. 검모장과 안승의 부흥운동은 670년 4월~8월간 궁모성을 근거지로 군사를 일으켰다. 고구려 왕족의 후손인 안승은 신라에 항복하여 지금의 익산 지역에 보덕국왕으로 임명되었다. 검모장은 안승을 추대하는 것으로 하여 부흥운동을 꾀하였지만 내분으로 이들간의 사이가 갈라져 안승이 검모장을 살해(670년 8월)하여 사실상 끝이 났다.


5. 보장왕의 고구려 부흥운동

한편 고구려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한 당나라는 압송된 보장왕을 전쟁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고 하여 677년 "요동도독조선군왕"으로 임명한다. 이 때는 그는 고구려의 재건을 위해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한다. 그러나 발각되어 681년 양주로 유배된다.


6. 제나라

제나라(濟)는 782년 이납이 세운 독립 왕국이다. 765년 고구려 유민이었던 이정기는 부하들과 군사를 일으켜 평로치청 절도사를 주살하고 산둥반도 5개 주를 점령하면서 절도사로 옹립된다. 이를 바탕으로 서북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해 가면서 6개의 주를 지배하게 된다. 당시 고구려 유민들은 과거 영광에 대한 향수와 당에 대한 불만이 있었던 탓에 관직을 높여 주면 회유 정책을 펴왔었는데, 이는 이정기에 절도사 지위를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게 되고 이로 인해 군사를 양병할 수 있게 되면서 사실상 독립국을 구축하게 된다. 그러면서 당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장안을 공격하는 등 당 조정을 위협하게 된다. 이후 아들 이납, 이사고, 이사도에게 왕위가 이어지게 된다. 제나라의 국호 선포는 2대 이납에 의해 782년 제왕(濟王)을 공표하면서 부터다.


7. 대조영의 고구려 부흥과 발해 건국

고구려 유민의 당의 통치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본토로 대거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고구려 유민 일부가 동만주로 탈출하게 되며, 대조영을 중심으로 세를 불리기 시작하여 발행가 건국된다.


8. 백제의 부흥운동

백제의 부흥운동은 복신(福信)·도침(道琛)·지수신(遲受信)·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이끄는 '백제 부흥군'이 당나라에 맞섰지만 임시 국가 체제를 갖추지 못한 항전 운동으로 끝나고 말았다.

백제 부흥운동은 무왕(武王)의 조카이자 의자왕(義慈王)의 사촌형제인 복신(福信)에 의해 시작되었다. 복신은 승려인 도침(道琛)과 힘을 합쳐 주류성(周留城 : 충남 한산)을 근거지로 삼아 당나라에 맞서 싸우면서 백제의 재건하려 했다. 이들은 왜국에서 부여풍(扶餘豊)을 모셔와 백제의 왕으로 옹립한 후 독립 왕국을 세웠지만 내분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의 패잔 병사 3만여 명을 규합하여 부여풍의 백강 전투가 패배로 끝나고 주류성이 함락되자 당나라에 항복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나라에게 정성을 보이기 위해 지수신이 이끄는 임존성을 토벌한다.


9. 신라의 부흥운동

신라의 부흥운동은 마의태자등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통상적으로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에 대해 신라 말기에는 국가 통치 체제와 관리가 문란해지고 국가 재정도 파탄에 이르러 국민의 삶이 위협받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시대때 과거 신라 영토에서 일어난 동경의 난, 김사미의 난, 효심의 난이 신라부흥운동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이에 대해 학계는 신라 부흥을 명분을 앞세운 반란일 뿐이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국가의 통치체제나 지속기간이 길지 못했다.


10. 가야의 부흥운동

가야의 부흥운동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11. 발해의 부흥운동

발해는 고구려의 부흥운동 중 하나이며, 국가 체제의 갖추었으며 지속기간도 약 200년(698~926년)으로 한반도 북부와 만주, 연해주에 걸쳐 극동 아시아의 강자로 성장했다. 발행의 시작은 연해주 및 간도 지역으로 추정되며 두막루를 정벌하면서 해동성국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하지만 거란에 의해 멸망한 후 동란국(926~936년), 후발해(928~938년), 정안국(938~986년), 올야국(995~996년), 흥요국(1029~1030년), 대발해(대원국)(1116년 1월~5월)로 이어졌다.


12. 고려의 부흥운동

고려 부흥 운동은 딱히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일단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공양왕이 이성계에 왕위를 물려주는 형식을 갖췄고, 일부 반대세력이 있었지만 지배층 상당수가 그대로 흡수되어 조선 건국에 참여했다. 또한 사병 혁파를 통해 호족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어 거병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13. 조선의 부흥운동

조선의 부흥운동도 이렇다할만 게 없다. 앞서 언급한 근왕파를 중심으로 조선 왕조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실패하였다. 그 후 조선을 침탈한 일제에 대한 항일운동, 독립운동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대한임시정부라 할 수 있다.


김용옥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사 10부작


그렇다면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부흥운동, 독립운동 그리고 항일운동은 뭐가 다른가? 부흥운동은 패망한 국가를 복원 혹은 계승하기 위한 국가 재건운동이다. 독립운동은 아예 새로운 주권 국가를 건국하기 위한 운동이다. 항일운동은 일본 침탈에 맞춰 저항한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부흥운동을 독립운동이라 하지 않았다면 발해와 같이 고구려를 계승하긴 했지만 별도의 연호를 썼던 제나라는 독립운동을 한 것일까? 나아가 역사적 이견은 있지만 말갈족이 분명 우리 역사에 일부였던 점을 감안하면 두막루는 부여를 계승하긴 하였어도 새로운 독립국가였으니 이 역시 독립운동을 했던 것이 아니었나? 그런데 왜 교과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가?


Posted by Road Ide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