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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와 청나라를 세운 민족은 여진족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과연 여진족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고려때 우리나라를 괴롭혔던 거란족과 여진족으로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교과서에서 오랑캐로만 접했던 여진에는 놀라운 비밀이 감춰져 있다. 여진족은 만주의 유목민족으로 역사의 용광로같은 시기와 지리적 특성을 갖고 있어 민족과 문화가 매우 뜨겁게 서로 동화되었던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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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의 패권자는 크게 동호, 예맥, 숙신이 있었다. 동호는 흉노 - 선비 - 우문선비를 걸쳐 연나라(전연, 전진, 후연, 북연)에 통치를 받다가 고막해, 실위를 걸쳐 당나라의 지배(요약도독부, 실위도독부)를 받았고 요나라 - 금나라 - 원나라 - 명나라 - 해서(훌룬구룬) - 후금 - 청나라 - 중국에 이르렀다. 예맥은 부여와 고구려으로 나누었다가 부여는 두막루를 거쳐 발해로 이어지고 요나라(정안국, 동란국) - 금 - 원 - 명 - 청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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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고조선의 기원이 불분명하나 예맥을 시원으로 하는 부여와 고구려와 이들 국가의 발원지역이 다르고, 사료에도 같다는 기록이 없다. 그래서인지 재야사학자들 중심으로 홍산문명과 환단고기에 의한 해석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일지 모르겠다. 


여진의 기원과 명칭은 숙신 - 읍루 - 물길 - 말갈 - 여진 - 금 - 원 - 명 - 청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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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중 우리나라의 역사라고 생각되는 국가를 골라보자.


고조선, 부여, 고구려, 동예, 옥저, 두막루, 발해, 동진국, 금, 청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조선, 부여, 고구려, 동예, 옥저, 발해 정도를 꼽을 것이다. 그러나 여진에 대해 알고나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여진족은 중국 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과 러시아의 연해주, 하바롭스크, 아무르 주 뿐만 아니라 한국의 함경도 지역에 이르기까지 거주했던 퉁구스 족의 민족을 모두 통칭해서 이른다. 


이쯤되면, 그동안 배워왔던 우리 고대사에 대한 역사 부분에 대해 약간 혼란이 올 것이다. 우선 피지배층으로만 알았던 말갈족이 과연 지배층은 없었나? 대답은 결코 그렇지 않다. 이를 두고 식민사관에서 기인했다고 보는 이도 있다. 그 이유는 한(韓)민족으로 국한하여 일제가 조선침탈에 악용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증거로 바로 BC 3세기경 관구검의 고구려 침략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는 예맥족으로 이루어진 국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관구검이 이 때 끌고 온 예하 부대는 갈족과 말갈족이었다. 말갈이 지리적으로 고구려 동북쪽에만 존재했다면 고구려의 서쪽에 위치한 연나라에서 말갈족을 이끌고 고구려를 칠수 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즉 말갈족은 여러 지역에 분파되어 혼재되어 있었고 고구려에도 이미 말갈족이 있을 수 밖에 없다.

둘째, 우리 역사로 보고 있는 부여, 동예, 옥저는 분명 말갈족이었다. 부여의 기원은 예맥족으로 보고 있으나 예맥족 역시 하나의 부족이 아닌 예족과 맥족이며, 부여의 근거지 역시 백산 말갈의 근거지였기 때문에 이 또한 부여가 건국당시에도 이미 예맥족만으로만 구성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또한 옥저와 동예에 대한 부분은 조선 건국시 기록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만주는 5호16국을 비롯한 역사의 회오리에 있었기 때문에 갈족(흉노족의 일파로 보고 있음), 말갈족, 선비족이 융화되어 여진족을 이루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즉 금, 원, 명, 청의 통일국가를 이룩하기 이전에 여러 만주족들이 융화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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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가 건국되어 만주의 여러 민족들은 융합되고 유목민족 특성상 고유 문화가 부족했던 여진족은 한족 문화에 급속도로 동화되어 버리고, 이 과정에서 거란족까지 여진족에 융화된다. 금나라가 멸망한 후 여진은 야인 여진, 해서 여진, 건주 여진으로 쪼개지게 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바로 만주족에 대한 방점을 어느 곳에 두느냐에 달렸다. 바로 이 점이 중국의 동북공정의 학술적 핵심이다. 즉 예맥과 숙신은 만주에 존재하고 있었고, 만주 패권을 두고 자웅을 겨루면서 서로 융화되어 갔으며 금-원-명-청이라는 통일국가를 통해 완전히 동화되어 갔다. 즉 < 홍산문명 - 동호/예맥/숙신 - 부여(-두막루) - 고구려 - 발해 - 금 - 청 >으로 보는 것이다. 앞으로 한발 더 나아가 예맥족은 백산말갈의 한 분파였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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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크고 작은 외침 모두를 합쳐 약 1,000번이 넘는다. 그 과정을 통해 국가의 흥망성쇠가 있어왔고, 다시 재건하고자 부흥운동이 있어왔다.


그런데 경술국치 이후 중국 및 미국의 항일운동에 대해서는 독립운동이라고 하고 그 외 국가 재건은 부흥운동이라고 한다. 왜 일까? 심지어 경술국치 이후 근왕파 중심으로 조선왕조의 복원하려는 시도는 독립운동이라 하지 않고 복벽주의 운동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나라 역사상 부흥운동은 무엇이 있었을까?


1. 고조선 부흥운동

고조선(위만조선)이 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고조선 유민은 큰 저항을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중심에 해모수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BC108년 고조선이 한나라와 약 1년간 전쟁을 벌이다가 패망하였는데, 내분에 의한 패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나라에 항복하길 원하는 신하들은 우거왕을 죽였지만 '성기'는 끝까지 왕검성에서 투항하였지만 함락당하고 만다.


2. 남부여의 부여 부흥운동

부여(기원전 2세기~494년)에 대한 연구가 고대사이기 때문에 국내 연구가 매우 미흡하다. 부여는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 남부여로 구분하여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 중 남부여는 백제 성왕이 백제의 국호를 남부여로 바꿔 패망한 부여의 이름을 사용했다. 과거에는 이에 대한 단순 국호 변경으로만 보았으나 이에 지나지 않고, 건국신화, 무덤 양식등을 비교한 연구들이 나오면서 백제가 부여로부터 분파되었고, 이를 오래전부터 계승해온 것이 아니냐는 견해가 생겨났다.


3. 두막루의 부여 계승

두막루가 우리나라의 역사인지 논란이 있지만 부여 유민이 나하를 건너 건국한 국가라는 견해가 지지를 얻어가고 있다. 위치는 중국 헤이룽장 성의 하얼빈시 부근으로 추정되며 AD 410년경 건국되어 726년 약 300년간 존재하다가 발해 무왕에게 멸망했다. 따라서 고구려에 의해 패망한 부여 유민이 만주 북동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세운 국가라고 본다면 두막루는 부여를 계승한 국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두막루를 실위 또는 몽골계 국가로 보는 견해도 있기 때문에 부여의 계승국이냐 혹은 말갈족을 우리 민족으로 보느냐에 따라 두막루에 대한 견해가 크게 달라진다.


그런데, 두막루의 구성은 부여에서 넘어간 유민들인데, 이들 대부분은 말갈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말갈족이라 우리 역사에 편입시킬 수 없다면, 고구려, 발해는 우리의 역사가 아닌 셈이 되는 것이다. 교과서대로 말갈족은 지배층이 아닌 피지배층이라는 반론을 편다면, 부여 주민의 대부분은 말갈족이기 때문에 부여는 우리 역사가 아니다. 또한 말갈족이라 하여 단 한명도 관료가 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 이유로 발해 건국당시 두막루와 발해 건국시 거점지역에 양분되어 지방 호족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대조영이 거병할 당시 흑수말갈 출신의 무장들이 있었다. 뿐만아니라 두막루는 726년 발해 무왕에 의해 정복되에 흡수되어 양분되었던 흑수말갈 모두 발해에 동화되었다.


말갈족은 7부족으로 나뉘는데, 숙말말갈(지린 시), 백산말갈(지린성 - 바이산 시, 옌벤 조선족 자치주, 연해주 - 하산/하산스키 군), 우루말갈(연해주 - 우스리스크, 파르티잔스크, 올가), 불열말갈(헤이룽장 성 - 지시 시, 무단장 시), 철리말갈(헤이룽장 성 - 하얼빈), 훨희말갈(연해주 - 달네렌첸스크), 흑수말갈(헤이룽장 성 - 솽야산 시, 자무쓰 시, 허강 시, 이춘 시, 하바롭스크 지방 - 비킨, 뱌젬스키, 라조, 하바롭스크)이다. 말갈(靺鞨) 7부 중에 불열부(불열말갈), 백돌부(백돌말갈), 호실부(호실말갈), 안거골부, 흑수부(흑수말갈)는 퉁구스(숙신계)계 부족이며, 옛 부여와 북옥저 지역에 있는 속말부(속말말갈), 백산부(백산말갈)는 예맥계인 부여와 옥저에 숙신계가 혼합되어 있었으며 점차적으로 점차 고구려와 동화된 부족이다. 이외에 사모말갈(思慕靺鞨), 군리말갈(郡利靺鞨), 굴열말갈(窟說靺鞨), 막예개말갈(莫曳皆靺鞨) 등도 있었다. 


p.s. 그렇다면 여기서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 바로 금과 청에 대한 해석이다. 어쩌면 여기서 중국의 동북공정이 떠오를지 모른다. 


4. 검모장과 안승의 고구려 부흥운동

고구려의 경우,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패망한 후 고안승, 고연무, 검모장 등에 의해 부흥운동이 있었다. 검모장과 안승의 부흥운동은 670년 4월~8월간 궁모성을 근거지로 군사를 일으켰다. 고구려 왕족의 후손인 안승은 신라에 항복하여 지금의 익산 지역에 보덕국왕으로 임명되었다. 검모장은 안승을 추대하는 것으로 하여 부흥운동을 꾀하였지만 내분으로 이들간의 사이가 갈라져 안승이 검모장을 살해(670년 8월)하여 사실상 끝이 났다.


5. 보장왕의 고구려 부흥운동

한편 고구려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한 당나라는 압송된 보장왕을 전쟁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고 하여 677년 "요동도독조선군왕"으로 임명한다. 이 때는 그는 고구려의 재건을 위해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한다. 그러나 발각되어 681년 양주로 유배된다.


6. 제나라

제나라(濟)는 782년 이납이 세운 독립 왕국이다. 765년 고구려 유민이었던 이정기는 부하들과 군사를 일으켜 평로치청 절도사를 주살하고 산둥반도 5개 주를 점령하면서 절도사로 옹립된다. 이를 바탕으로 서북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해 가면서 6개의 주를 지배하게 된다. 당시 고구려 유민들은 과거 영광에 대한 향수와 당에 대한 불만이 있었던 탓에 관직을 높여 주면 회유 정책을 펴왔었는데, 이는 이정기에 절도사 지위를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게 되고 이로 인해 군사를 양병할 수 있게 되면서 사실상 독립국을 구축하게 된다. 그러면서 당나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장안을 공격하는 등 당 조정을 위협하게 된다. 이후 아들 이납, 이사고, 이사도에게 왕위가 이어지게 된다. 제나라의 국호 선포는 2대 이납에 의해 782년 제왕(濟王)을 공표하면서 부터다.


7. 대조영의 고구려 부흥과 발해 건국

고구려 유민의 당의 통치에 대한 저항이 계속되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들을 본토로 대거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고구려 유민 일부가 동만주로 탈출하게 되며, 대조영을 중심으로 세를 불리기 시작하여 발행가 건국된다.


8. 백제의 부흥운동

백제의 부흥운동은 복신(福信)·도침(道琛)·지수신(遲受信)·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이끄는 '백제 부흥군'이 당나라에 맞섰지만 임시 국가 체제를 갖추지 못한 항전 운동으로 끝나고 말았다.

백제 부흥운동은 무왕(武王)의 조카이자 의자왕(義慈王)의 사촌형제인 복신(福信)에 의해 시작되었다. 복신은 승려인 도침(道琛)과 힘을 합쳐 주류성(周留城 : 충남 한산)을 근거지로 삼아 당나라에 맞서 싸우면서 백제의 재건하려 했다. 이들은 왜국에서 부여풍(扶餘豊)을 모셔와 백제의 왕으로 옹립한 후 독립 왕국을 세웠지만 내분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의 패잔 병사 3만여 명을 규합하여 부여풍의 백강 전투가 패배로 끝나고 주류성이 함락되자 당나라에 항복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나라에게 정성을 보이기 위해 지수신이 이끄는 임존성을 토벌한다.


9. 신라의 부흥운동

신라의 부흥운동은 마의태자등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통상적으로 없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에 대해 신라 말기에는 국가 통치 체제와 관리가 문란해지고 국가 재정도 파탄에 이르러 국민의 삶이 위협받는 수준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시대때 과거 신라 영토에서 일어난 동경의 난, 김사미의 난, 효심의 난이 신라부흥운동이었다는 견해가 있다. 이에 대해 학계는 신라 부흥을 명분을 앞세운 반란일 뿐이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국가의 통치체제나 지속기간이 길지 못했다.


10. 가야의 부흥운동

가야의 부흥운동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11. 발해의 부흥운동

발해는 고구려의 부흥운동 중 하나이며, 국가 체제의 갖추었으며 지속기간도 약 200년(698~926년)으로 한반도 북부와 만주, 연해주에 걸쳐 극동 아시아의 강자로 성장했다. 발행의 시작은 연해주 및 간도 지역으로 추정되며 두막루를 정벌하면서 해동성국으로 급부상하게 된다. 하지만 거란에 의해 멸망한 후 동란국(926~936년), 후발해(928~938년), 정안국(938~986년), 올야국(995~996년), 흥요국(1029~1030년), 대발해(대원국)(1116년 1월~5월)로 이어졌다.


12. 고려의 부흥운동

고려 부흥 운동은 딱히 없었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일단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공양왕이 이성계에 왕위를 물려주는 형식을 갖췄고, 일부 반대세력이 있었지만 지배층 상당수가 그대로 흡수되어 조선 건국에 참여했다. 또한 사병 혁파를 통해 호족 세력이 급속히 약화되어 거병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13. 조선의 부흥운동

조선의 부흥운동도 이렇다할만 게 없다. 앞서 언급한 근왕파를 중심으로 조선 왕조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실패하였다. 그 후 조선을 침탈한 일제에 대한 항일운동, 독립운동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대한임시정부라 할 수 있다.


김용옥 선생의 한국독립운동사 10부작


그렇다면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와 보자.

부흥운동, 독립운동 그리고 항일운동은 뭐가 다른가? 부흥운동은 패망한 국가를 복원 혹은 계승하기 위한 국가 재건운동이다. 독립운동은 아예 새로운 주권 국가를 건국하기 위한 운동이다. 항일운동은 일본 침탈에 맞춰 저항한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부흥운동을 독립운동이라 하지 않았다면 발해와 같이 고구려를 계승하긴 했지만 별도의 연호를 썼던 제나라는 독립운동을 한 것일까? 나아가 역사적 이견은 있지만 말갈족이 분명 우리 역사에 일부였던 점을 감안하면 두막루는 부여를 계승하긴 하였어도 새로운 독립국가였으니 이 역시 독립운동을 했던 것이 아니었나? 그런데 왜 교과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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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이것이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한국 고대사 특히 고조선, 고구려, 부여, 발해의 역사를 한국이 아닌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역사 왜곡 정책이다. 세삼스레 1,000년이 넘은 역사를 가지고 중국이 역사 분쟁을 하려는 의도는 여러가지 정치적 의도가 있다.


가장 큰 이유로는 중국내 소수민족의 분열을 막고자 하는 것이다. 즉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기 위해 중국내 소수민족도 한족과 같이 중국이라는 국가 테두리 속에서 하나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두번째는 북한내 지배력을 역사적 당위성을 만들기 위함이다. 북한과의 정치적, 군사적 유대관계 뿐만 아니라 북한도 중국의 하나의 지역이라는 점과 한반도 유사상황에서 역사적 명분을 쌓기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든다. 실제 중국은 북한 접경 지역의 동북 3성에서 북한까지 포함시켜 동북 4성이라 지칭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셋째, 동북아시아 유물 발견 과정에서 나타난 홍산문명에 대한 중국 편입을 위함이다. 요하강 및 만주 일대에서 발견된 홍산 문명이 그동안 한족 중심의 황하 문명과 확연히 다른 석관묘, 옥 유물 등이 출토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동안 중국 한족의 중요한 표상인 용이나 한자 유물보다 더 앞선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 한족 문화에서는 적석관묘나 옥을 사용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우리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관심은 어떠할까? 동북공정에 대해 들어보지도 못했다는 사람이 45%, 들어본 듯 하다 30%, 어렴풋이 알 것 같다 20%, 알고 있다 5%에 이르러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따라서 정부는 동북아 역사재단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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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동북공정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실체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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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근 한국 정부의 외교적 대응은 의아하다. 중국 동북3성 지방 주변 영토와 역사가 모두 중국의 것이라는 자료에 대해 이명박 정권이 2012년 미국 의회 보고서에 제출한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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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한 jTBC 뉴스 보도에 따르면, 한반도 유사시 영토 문제와 관련해 중국의 개입 전략을 분석하기 위한 2012년 12월 미국 의회 보고서에 중국의 동북공정에 관한 지도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기원전 108년 한 무제가 고조선 지역내 한사군의 하나였던 진번(기원전 3세기부터 등장)이 있고, 표기 역시 중국어식으로 바뀌었다. 특히 진번, 임둔, 낙랑, 현도 등의 한사군의 경계를 지도에 명확히 표시해 마치 실효 지배가 있었던 것으로 적시하고 있다.


그런데 외교통상부가 동북아역사재단 등에 의뢰해 제작한 것으로 동북아역사재단은 앞서 언급한대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된 단체다. 또한 여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경쟁했던 삼국시대를 누락시켜 일본의 '임나본부설'을 반영했다는 문제제기까지 나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08년부터 46억원을 들여 만든 동북아 역사지도에는 신라시대 부분에 독도가 누락되어 있어 일본 역사 왜곡 논란까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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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에 치욕적인 기록은 뭐가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경술국치일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1639년(인조17년)에 세워진 삼전도비가 있다. 삼전도비(三田渡碑)는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라고도 하며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47에 세워져 있다. 삼전도비의 이름에 대한 기원은 비문이 세워질 당시 지명이 경기도 삼전도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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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전도비는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가 조선을 정벌하고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항복한 사실을 기록되어 있다. 결국 삼전도비는 병자호란을 승리한 청나라 태종의 공덕을 알리기 위해 조선에 요구하여 세워진 것이다. 


당시 소중화사상을 갖고 있던 조선사대부들에게는 치욕적인 상징과 같은 것이다. 훗날 송시열, 이경석은 삼전도비를 찬한 것을 문제삼아 그를 공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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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세 아이들에게 최고의 선물로 꼽히는 것이 바로 터닝 메카드다. 국내 EBS를 통해 방영되는 국산 애니메이션이다. 이를 국내 손오공이라는 회사에서 판매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인기가 높은 장난감이 사기가 어려울까?

시중에 알려진 루머는 업체 측에서 물량을 조절해서 품귀현상을 유발시켜 사재기를 조장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 높은 만화의 주인공 테롯은 구매하기 너무 구하기 어려워 윗돈이 붙어 거래되고 있는데 정가 1.6만원에서 10만원에 이르고 있다.

현재까지 20여종에 이르는 메카닉몰이 출시되었고, 최근 크기가 커진 제품도 나와 가격도 오른 상황이다.

그런데 아직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종영되거나 완료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새로운 캐릭터가 출현될 것이고 신 메카닉몰은 또 출시될 것이 예상되기 때문에 부모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따라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물량이 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사기 힘든 장난감이라는 인식이 더 커지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짝퉁 터닝메카닉도 수 개에 이르고 심지어 짝퉁 제조업체의 온라인 판매도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는 국내 장난감 제조, 생산의 구조적 특성이 있다. 국산 장난감 생산은 국내 생산 시설을 갖춘 업체는 단 1 곳도 없다.

국내 TV 방영이 되면 국내에서 설계에 들어가서 중국 제조업체와 MOU를 체결해 생산한 후 국내로 수입하여 판매가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따라서 자체 캐릭터가 아니라 TV나 영화의 애니메이션에 의존하다 보니 주력의 캐릭터 산업이 아니다. 따라서 애니메이션의 흥행 여부에 따라 장난감의 인기가 결정되다 보니 제조 당시 성공여부를 캐릭터 자체만으로 예상할수 없다. 또한 캐릭터의 인기가 어느 정도나 유지될지도 시장 판단을 할수 없게 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생산 주문량을 얼마나 해야 할지 예상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둘째, 국내 생산 시설이 없다 보니 생산과 수입하여 국내 유통 직전까지 2~3개월이 소요된다. 따라서 국내에서 높은 반응을 보이더라도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없고, 설사 추가 주문을 하더라도 2~3개월후 장난감의 인기가 또 어떻게 변할지 예상하기 어렵다.

셋째, 국내 생산이 없다 보니 시장 반응에 맞춰 공정 라인을 조정할수 없다.

이러한 열악한 장난감 산업의 구조는 이번 터닝메카드 혼란이 처음이 아니었다. 과거 세계 장난감 규모가 7조원에 이르기 때문에 이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국가적 비전이 제시된 바 있었다. 그러나 지금 오히려 영세하게나마 유지되어 오던 생산시설은 아예 사라진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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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애기 예수가 태어난 성탄절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아니다. 하지만 1977년이후 돌아온 보름달이 뜨는 성탄절이다. 이 날을 럭키 크리스마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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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디북스가 눈이 번쩍 띄는 도서 할인 행사를 한다. 거기다가 100% 페이백 행사다. 


도대체 약 빨았나? 싶을 정도의 행사다.


계속 카드를 만지게 만드는 행사네요. 사실 이번 1차 행사엔 이미 소장하고 있는 책도 있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았다면 무조건 질렀을 것 같네요. 1차 행사는 소설 114권, 2차 행사는 역사 90권, 3차는 고전 197권...한마디로 할 말 잃었습니다.



기뻐해야 할지...슬퍼해야 할지...모를 정도의 100% 페이백 폭탄 3연속 연쇄할인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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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삼국시대 고대어는 어떠했을까?


우선 중국어와 삼국시대의 고대어간의 차이는 바로 어순이 차이로 보고 있다. 즉 한국의 고대어는 어순의 차이에서 시작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은 700년 이상 독립적인 국가로 존재했기 때문에 다를 것이라고 보는 견해와 방언 수준으로 어휘 정도가 달랐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주장에 핵심은 바로 어원에 있다.


그 비밀을 밝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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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문 선생의 < 천왕이 된 백제의 왕자들 >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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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밝혀지는 가야계, 백제계로 이어지는 일본의 천왕의 계보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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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1TV에서 방영한 일본의 고대국가의 기원에 대해 다큐멘터리다. 관련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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